[Vol.9] "심리학 공부하면 연애에 도움? 오히려 뇌과학에 가깝죠"

[명사인터뷰]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중학교 입학시험이 존재하던 1960년대 초, 당대 최고 명문학교인 경기중학교 입학이 당연한 줄 알았던 한 소년의 꿈을 좌절시킨 건 '자반병'이었다. 걸핏하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꽃처럼 번지고 코피가 나는 병을 앓으면서 공부를 한 학기 정도 쉬었더니 어느새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결국 마음에 차지 않는 중학교에 들어갔고 3년 내내 공부 대신 소설책에만 빠져 살았다. 좌절에 빠진 그를 일으킨 건 학교 선생님의 한 마디였다. 여느 때처럼 빈 교실에 남아 책을 보던 소년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성열아, 아직도 가슴이 아프니?"

그 말에 소년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을 붙잡고 소리 내 울면서 마음에 있는 화를 모두 날려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성열(65)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상담심리학에 대해 설명하며 대뜸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긍정심리학자'인 한 교수가 누구보다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점이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한 교수는 "한 사람의 도움으로 아픈 마음을 씻어낸 내가 상담심리를 전공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한 교수는 심리학자라는 진로를 선택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 교수의 아버지는 상담심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과서처럼 여기는 '카운슬링의 이론과 실제'(칼 로저스)를 번역한 한승호 전 국제대학교 교수다. 한 교수는 상담심리가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부터 부친이 책을 쌓아놓고 공부하던 것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덕분에 심리학에 대한 개념이 없다시피 했던 1970년대에도 한 교수는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심리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열 길 물속보다 더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게 심리학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한 교수는 "정확히 말하면 사람 마음'만' 공부하는 학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루는 어느 고등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다가 한 학생에게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를 물었더니 '연애할 때 도움 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을 들었어요.(웃음) 이런 생각을 갖고 대학에 와서 '심리학개론' 수업을 들으면 크게 실망할 겁니다. 심리학 교재 첫 장을 펼치면 사람의 마음이 아닌, 뇌 구조에 대한 설명이 나와요. 각종 심리학적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살피는 부분이 뇌의 반응이거든요. 실험을 설계하고 논문을 쓰는 등의 연구 과정에서는 상당 부분 자연과학적 지식이 필요해요. 단순히 인간의 심리가 궁금한 학생이라면 오히려 철학과에 들어가는 게 맞을 겁니다."

실제로 대중들이 많이 알고 있는 심리학 법칙의 대부분은 누구나 수긍할 만한 논리적 실험을 통해 도출된 것이다. 때로는 쥐, 토끼 등 동물을 대상으로 약물 실험도 하고 뇌의 변화를 알기 위해 MRI(자기공명영상) 촬영도 한다. 한 교수는 "우리학교 심리학과는 대학원 졸업생에게 문학석사와 이학석사 학위를 모두 준다"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적 지식이 함께 결합된 것이 심리학의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한 교수의 전공인 상담심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는 상담심리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위해 직업의 고충에 대해서도 미리 일러줬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감정에 휩싸여서 같이 힘들어 지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 교수는 "상담자도 또 다른 상담자를 찾아서 마음을 털어놓는다"며 "마음을 풀지 않으면 다른 내담자와 상담할 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내담자 감정에 동화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훈련도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마음이 아픈 청소년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굉장히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화를 풀려면 자신의 진로나 적성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 일찍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퇴로가 없어요. 학생들이 하고 싶은 걸 못하고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는 이 체제가 학교폭력이나 청소년 범죄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흥미로운 일에 시간을 투자 하는 것에 대해선 화가 안 나거든요.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학생들에게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여기 제 제자로 들어온 학생들도 진로를 결정하는 4학년 때까지 본인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요. 다들 좋아하는 일이 뭔지 찾아볼 겨를조차 없었거든요. 자유학기제가 이런 학생들의 숨통을 트여줄 수 있는 좋은 제도로 활용됐으면 좋겠습니다."



 ■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권위자.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심리학이 우울,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는 데 매몰된 점을 지적하며 긍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연구,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져왔다. 한국자살예방협회 이사, 한국치유상담협회 부회장, 한국사회문제심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